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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베스트무비

시대별 한국영화상에서 최고의 무비, 드라마 리스트

한국영화 역사

한국영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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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y 20, 2017 한국영화

1. 영화 시장

매출 금액 기준 세계 6-7위권을 왔다갔다 하며, 1인당 평균 연간 극장 관람객 수는 4.5회로 미국(4.3회)보다도 많은 세계 1위이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한국에서도 떠야 잘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이에 할리우드 스타들의 한국 방문도 많아지고 있는 추세. 지리적으로 인구 1억인 일본과 13억의 중국과 붙어 있는 절묘한 위치라서 이전부터 방한은 꽤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꼽사리가 아닌 한국 영화 시장 자체만으로도 고평가를 받고 있어 외국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편.

영화 마니아도 한국에서 인구대비 비율로 제일 높은 편에 속하고,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극장 예매도 극도로 발달해 있을 정도로 급속한 성장을 겪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 영화시장이 저성장 추세에 갇히는 등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한국은 한국 국내영화와 미국 영화가 박스오피스 주류를 차지하며, 천만 관객 돌파 영화는 전부 한국 영화 아니면 미국 영화이다. 이외의 국가 영화는 5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것이 없다. 일본 영화의 《너의 이름은.》(365만), 영국 영화의 《어바웃 타임》(341만) 두개가 최고치.

한국의 주요 영화 배급사는 CJ E&M,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 네군데를 통칭 “빅4″라고 하며, 이 4사의 한국 박스오피스 점유율은 50%를 전후하여 매우 비중이 높다. 이외에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가 빅5로 불리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다만 관객 동원 수는 디즈니가 2-3위), 유니버셜 스튜디오 같은 배급사 등도 있으며, 소형 배급사가 난립해있는 구조적 차이도 있다. 이들 배급사의 협상력에 따라 박스오피스 진입 순위가 달라지는 구조이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2013년 《겨울왕국》이 1000만 관객을 처음 돌파한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세에 올라타서, 200만명 이상의 중박 이상을 동원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늘어나 한국 영화시장에서 애니메이션의 점유율도 20% 정도까지 올라섰다.

전반적으로 한국 영화시장과 가장 유사한 나라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꼽히고 있다.

2010년대 들어서 한국 영화판만의 특징이 생겼다. 그야말로 전 세계 영화의 전쟁터가 된 것이다. FTA가 체결된 나라의 영화는 무조건 한국에 개봉된다고 보면 될 정도로 전 세계 영화가 줄줄이 한국 영화 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며, 북미보다도 한국이 개봉영화 국적 수가 다양한 편이다. 한국인들한테는 이게 잘 안 알려져 있는 게 특이점.

2. 역대 한국 영화 시장 극장 관객수

역대 한국 영화 시장 극장 관객수[1]

1910년대에는 수십만 수준이었다가 1930년대 중반에 400-500만 명, 1930년대 말에는 700만 명 수준에도 이르렀다.[2]

한국영화 외국영화 총계 인구(만 명)
연도 관객수(만 명) 점유율 관람회수(1인) 관객수(만 명) 점유율 관람회수(1인) 총관객수(만 명) 총관람회수(1인)
1965 0 0% 0 0 0% 0 12,170 4.2
1966 0 0% 0 0 0% 0 15,634 5.3
1967 0 0% 0 0 0% 0 16,408 5.4
1968 0 0% 0 0 0% 0 17,134 5.61
1969 0 0% 0 0 0% 0 17,304 5.5
1970 0 0% 0 0 0% 0 16,635 5.2 3,224
1971 0 0% 0 0 0% 0 14,630 4.4 3,288
1972 0 0% 0 0 0% 0 11,872 3.5 3,350
1973 0 0% 0 0 0% 0 11,462 3.4 3,410
1974 0 0% 0 0 0% 0 9,738 2.81 3,469
1975 0 0% 0 0 0% 0 7,560 2.1 3,528
1976 0 0% 0 0 0% 0 6,570 1.8 3,584
1977 0 0% 0 0 0% 0 6,493 1.8 3,641
1978 0 0% 0 0 0% 0 7,399 2 3,696
1979 0 0% 0 0 0% 0 6,552 1.7 3,753
1980 0 0% 0 0 0% 0 5,377 1.41 3,812
1981 0 0% 0 0 0% 0 4,444 1.2 3,872
1982 0 0% 0 0 0% 0 4,274 1.1 3,932
1983 1,755 39.80% 0.43 2,648 60.10% 0.66 4,404 1.1 3,991
1984 1,689 38.50% 0.42 2,703 61.60% 0.67 4,390 1.1 4,040
1985 1,644 34.20% 0.4 3,166 65.80% 0.78 4,810 1.2 4,080
1986 1,562 33% 0.38 3,166 66.90% 0.77 4,730 1.2 4,121
1987 1,311 27% 0.31 3,549 73% 0.85 4,860 1.2 4,162
1988 1,216 23.30% 0.29 4,007 76.80% 0.96 5,220 1.2 4,203
1989 1,115 20.20% 0.26 4,415 79.80% 1.04 5,530 1.3 4,244
1990 1,081 20.20% 0.25 4,265 79.70% 0.99 5,350 1.2 4,286
1991 1,106 21.20% 0.25 4,114 78.80% 0.94 5,220 1.2 4,329
1992 872 18.50% 0.22 3,839 82% 0.88 4,711 1.1 4,374
1993 769 15.90% 0.18 4,054 84.10% 0.92 4,823 1.1 4,419
1994 993 22% 0.24 3,842 79.50% 0.86 4,835 1.1 4,464
1995 944 20.90% 0.21 3,569 79.10% 0.79 4,513 1 4,509
1996 976 23.10% 0.19 3,244 76.90% 0.71 4,220 0.9 4,552
1997 1,212 25.50% 0.23 3,540 74.50% 0.77 4,752 1 4,595
1998 1,259 25.10% 0.29 3,759 74.90% 0.81 5,018 1.1 4,628
1999 2,172 39.70% 0.5 3,300 60.30% 0.71 5,472 1.2 4,661
2000 2,271 35.10% 0.42 4,191 64.90% 0.89 6,462 1.3 4,700
2001 4,481 50.10% 0.96 4,455 49.90% 0.93 8,936 1.9 4,735
2002 5,082 48.30% 1.07 5,431 51.70% 1.13 10,513 2.2 4,762
2003 6,391 53.50% 1.32 5,556 46.50% 1.15 11,947 2.47 4,785
2004 8,019 59.30% 1.65 5,498 40.70% 1.13 13,517 2.78 4,803
2005 8,544 58.70% 1.75 6,008 41.30% 1.23 14,552 2.98 4,813
2006 9,791 63.80% 2 5,549 36.20% 1.13 15,341 3.13 4,837
2007 7,939 50.00% 1.61 7,938 50.00% 1.61 15,877 3.22 4,859
2008 6,354 42.13% 1.28 8,729 57.87% 1.76 15,083 3.04 4,894
2009 7,641 48.68% 1.54 8,055 51.32% 1.62 15,696 3.15 4,918
2010 6,829 46.52% 1.35 7,851 53.48% 1.55 14,680 2.92 4,941
2011 8,287 52.00% 1.63 7,692 48.00% 1.51 15,979 3.15 4,977
2012 11,461 58.80% 2.25 8,027 48.00% 1.58 19,489 3.83 5,000
2013 12,729 59.7% 0 8,605 40.3% 0 21,334 0
2014 10,770 50.1% 0 10,736 49.9% 0 21,506 0
2015 11,294 52.0% 0 10,435 48.0% 0 21,729 0

3. 역사

3.1. 일제강점기 : 태동과 여명기

역사상 최초의 한국 영화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9년작 《의리의 구투》[3]’라고도 하나 이 작품은 100% 영화가 아니라 연극을 촬영한 혼합된 형식이었기에 이론이 있으며, 이로 인해 1923년작인 100% 극영화 《월하의 맹세》를 최초의 영화로 통용된다. 문제는 월하의 맹세가 조선총독부 지시로 제작된 관제 영화라는 점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의 시금석이라 평가되는 것은 그 유명한 춘사 나운규의 1926년작 《아리랑》이다. 그 전까지도 3편의 영화 참여 경험이 있던 나운규는 불과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흥행, 완성도, 주제 의식,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4]까지 두루 갖추어 어디에 자랑해도 손색이 없는 이 걸작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기 손색이 없는 위업을 수립했다. 더 놀라운 것은 주인공을 포함해 감독, 각본까지 1인 3역을 도맡았다는 점이다!

나운규는 아리랑으로 한국 영화에 처음으로 묵직한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1927년에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해 그가 사망하는 1937년까지도 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6년작 《풍운아》, 1928년작 《사랑을 찾아서》, 1929년작 《벙어리 삼룡이》 등이 대표적이다. 30년대에는 흥행 참패에 따른 슬럼프로 방황하기도 했고 때로 일본의 영화사에 몸을 담았다가 지탄받기도 했지만 끝까지 영화에 대한 열의를 잃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년인 1937년에는 《오몽녀》라는 걸작을 만들었으나 불과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리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이 소실되어 나운규나 당시 영화는 별로 남아있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랑 기념우표가 발행될 당시 우표에 수록된 장면이 아리랑 1편이 맞냐며 진위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5]

나운규가 10여 년에 걸쳐 불꽃같은 족적을 남기고 간 사이 한국 영화계는 한바탕 큰 혁신을 이룬다. 변사가 대사를 읊던 시절을 떠나, 비록 후시녹음이긴 하나 배우가 직접 대사를 내뱉는 발성영화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1935년작 《춘향전》이 최초의 발성 영화로 평가된다. 하지만 변사라는 직업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그들은 한국전쟁 이후까지도 존재했고, 심지어 아직도 직접 변사를 경험했던 인간문화재급의 인물이 생존해 있다. 변사는 무성영화 시절 영화의 재미와 감칠맛을 더해준 스타였으며 지금의 인기 성우나 개그맨 이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고 극장마다 서로 모셔가려 안달이었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상록수》로 유명한 작가이자 영화 관계자인 심훈도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필름이나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광복 이전 한국 영화 필름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필름 상태가 열악한 경우가 많은 반면에 필름 상태가 매우 좋은 당시 몇몇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일본에서 보관하고 있던 친일 홍보 영화다. 아직도 유튜브에는 《반도의 봄》이나 《집 없는 천사》 같은 영화들이 약간 남아있다. 그 밖에도 1993년 해외에서 필름이 발견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가 있는데 이게 그 시절 영화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친일 영화 제외)로 기록되기도 했었다.

그 뒤로 한국영상자료원이 작정하고 이 시대의 영화 필름을 찾아나선 결과 해외에서 한국 영화 필름들이 차례로 발굴되면서 이 기록이 차례로 깨졌다. 2005년 중국에서 양주남 감독의 발성영화 《미몽》(1936)이 발견되면서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로 기록되었으나, 2년 후인 2007년 서울의 단성사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안종화(1902~1966) 감독의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가 발견되면서 타이틀을 갈아치웠다.

이들 영화가 발견된 것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청춘의 십자로》는 2007년 구 단성사 건물이 철거되면서 창고를 비웠는데, 여기에 오래된 질산염 필름 9롤이 발견되었다. 이 중 8롤이 《청춘의 십자로》였다. 불행히도 이 중 1롤의 필름 보존상태가 너무 나빠서 백화현상이 생기며 바스라졌기 때문에 완전복원은 불가능했고, 나머지 7롤만 복원에 성공했다. 총 73분 정도의 분량이 복원되었는데 이 정도면 꽤 좋은 복원을 이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성영화 필름이라 관심도 뜨거웠다. 영상자료원은 복원 뒤 2008년에 변사의 해설과 함께 상영하기도 했고, 여러 차례 추가 재상영을 했다.

현존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한국영화이자 가장 오래된 발성영화인 《미몽》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2005년 중국에서 발견했을 때 필름 분량이 49분 정도만 남아 있고, 상태도 매우 나빠서 앞뒤 연결이 다소 안 되는 것이 흠이다. 이 작품도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곳에서 상영된 바 있다.

1934년 이전의 영화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영화 《아리랑》 필름이 남아있네 뭐네 논란이 있었으며 어느 일본인이 이 영화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통에 더 논란이 거세진 적이 있으나 거짓이 드러나기도 했다.

3.2. 1950년대 : 전후 부흥기

대한민국이 정부수립된 후 한국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나고 남북이 갈라지면서 영화계는 침체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50년대 중반을 지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한국 영화는 그 사이 발전한 영화 기술과 사회적 인프라에 힘입어 해마다 폭발적으로 제작 편수가 증가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150여 편에 불과했던 한국 영화가 50년대 후반에는 1년에 100편 가까이 찍는 기염을 토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자유부인》은 세련된 연출과 시대를 앞선 감각으로 50년대 한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또한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영화인들은 미국의 선진적인 영화 제작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고, 기득권이 없다시피 한 시점에서 신진 감독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후에 대감독으로 성장하는 신상옥 감독의 《막야》가 이미 한국전쟁 도중에 나왔고, 일세를 풍미한 김기영 감독이 데뷔한 것도 1955년이었다. 또한 《자유부인》의 대성공 덕택에 영화가 유망 엔터테인먼트로 급부상하면서 능력있는 인재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3.3. 1960년대 : 황금기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이라는 진통을 겪으며 출발한 60년대는, 한국 영화계에 있어서는 역량이 급속도로 끌어올려진 전성기였다. 60년대 초입부터 가족 멜로라는 독특한 장르가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 장르의 대표작인 신상옥의 《로맨스 빠빠》가 대흥행을 거뒀다. 《오발탄》처럼 당대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했으나 이데올로기를 의심한 당국의 압박을 견디며 힘겹게 상영했던 작품도 있었다.

이때 정부 당국에서 마련한 영화법은 다소의 제약은 있었으나, 덕분에 영화의 인프라가 확충되고 전반적 질적 수준이 상향되어 소위 보따리 영화상들을 퇴출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60년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면 바로 1960년작인 김기영의 《하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칭송을 아끼지 않은 이 작품은 그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은 서스펜스 영화의 걸작이며, 안성기가 이 작품을 계기로 유망 아역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21세기 리메이크판조차 이 작품에 견주면 졸작이라는 평론이 수두룩히 나올 정도.

이 작품을 통해 여러모로 시대를 한참 앞서간 김기영 감독은 뒤에도 하녀 연작 시리즈를 찍는 식으로 매너리즘적 면을 보이긴 하지만, 거장답게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완성도가 높다는 평을 받았다. 신상옥 감독과 유현목 감독도 이 시기를 풍미했으며 이 세 감독은 5~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도한 트로이카로 군림하였다. 또한 임권택, 정진우 감독도 이 시기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이 당시에 제작한 전쟁 영화의 경우 사용된 무기 소품이나 전투신의 수준이 시대를 감안하면 매우 훌륭한 수준으로 당시의 할리우드 영화와도 비견될 정도였다. 이유는 촬영에 한국군이 사용하던 실제 군용 장비를 사용하고, 실탄과 실제 폭약을 동원해서 전투신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리얼할 수밖에(…).[6] 당시 전쟁 영화의 상당수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했었고 이를 위해 한국군 군부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한국 영화계는 암흑기를 맞이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정치계부터 시작해서 사회문화계를 대대적으로 검열하게 되는 일대의 사건이었던 10월 유신이다.

3.4. 1970년대 : 한국 영화의 암흑기

달이 차면 기운다지만 70년대의 한국 영화는 60년대의 찬란함에 비해 급속히 그 빛을 잃었다. 텔레비전의 대중적 보급이라는 위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외국 영화가 급속히 시장을 침범한 탓이 컸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미국 영화들은 기존의 한국 영화들을 능가하는 신선한 재미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았고, 그 탓에 한국 영화들은 외국영화 수입을 위한 쿼터제를 맞추느라 내용도 부실하고 배우들이 엉성한 연기를 하는 졸작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꾸역꾸역 양산되어 전체적인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 물론, 1970년대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사회문화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검열되는 문제점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영화계는 한창 흑백에서 컬러로, 후시녹음에서 동시녹음으로 대대적 진화를 이루고 있었다. 1978년 정진우 감독은 《율곡과 심사임당》에서 동시녹음을 처음 시도했고, 1979년에는 한국 기술진이 한국 장비로 최초로 전격 동시녹음을 시도한 《심봤다》라는 영화를 찍어 대종상을 받았다. 이전에도 동시녹음 작품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의 지원을 받거나, 해방 후 미국공보원의 도움을 받아 찍은 것으로, 자체적인 여력 없이 부분적인 동시녹음법만 채택한 것이었다. 이렇듯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영화계는 점차 후시녹음 방식에서 동시녹음 방식으로 차츰 이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악순환 탓에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는 급격하게 도태되어갔고, 하길종 감독과 김호선, 이장호 감독 등 역량있는 신인들의 등장도 업계의 퇴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970년대 영화의 가장 큰 조류는 이른바 ‘청년영화’와 ‘액션영화’이었다. 70년대 후반 하길종 감독으로 대표되는 청년영화 장르는 당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하에서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하며 번민하고 고뇌하는 청년들을 그려내어 젊은 청년들의 가슴을 울렸으며, 관객들이 재미 본위를 추구하는 현 시점에서는 수요가 적어 인디 상영관에서나 걸릴 법한 내용임에도 당시에는 매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1975년에는 한국 영화사에 남을 걸작 청년영화 2편이 등장했는데 바로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7]과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이다. 70년대 젊은이의 뜨거운 낭만과 경직된 시대상을 잘 함축한 작품들로, 그 대담함과 구성미에 있어서는 오히려 요즘 영화가 더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가 싶어 보일 정도다.

이런 와중에 당시의 영화들은 누아르적 요소도 물씬하여, 말초적이고 남자 냄새나는 작품도 상당히 많았다.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서부 영화에서 착안한 만주 웨스턴이나 실록 김두한류의 일제시대 배경의 ‘협객영화’. 그리고 홍콩영화들에 자극받아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어졌던 ‘권격영화’가 대표적인 장르. 17대 1 같은 클리셰라든가 《다찌마와 리》에서 희화화된 특유의 오글거리는 대사들도 이 시기 영화의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90년대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조폭영화의 아버지격이라 하겠다.

아무튼 70년대 지속적 침체로 60년대를 풍미한 거장들도 차츰 빛이 바래갔고, 늘그막에 등장한 유현목의 1979년작 《장마》 정도가 기존의 거장으로서 체면치레를 했다. 이제 한국 영화계에 앞날은 없는 듯했다. 60년대와 비교하면 정말 강산이 바뀐 것이다.

3.5. 1980년대 : 중흥기와 코리안 뉴 웨이브

70년대부터 차츰 식어가던 한국 영화계는 뜻밖에도 3S정책이라 일컬어지는 정부 차원의 빵빵한 지원과 재능 있는 인재들의 출현이라는 호재 덕에 새로 중흥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70년대에 비해서 파격적으로 검열을 완화했고, 많은 영화인들이 이에 힘입어 참신한 소재들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를 표현하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제약이 따랐다.

80년대를 통틀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성행한 장르는 바로 에로 영화였다. 제5공화국은 유독 영화에서 성적인 요소에 대한 검열에 관대했는데, 이는 3S정책 중 섹스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애마부인》을 필두로 여러 에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표작으로는 80년대 최고의 미녀 스타였던 정윤희가 주연한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이두용 연출, 나도향 원작으로 유명한 《뽕》 등이 있다. 1970년대 당시 에로 영화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으며, 한 예로 1982년 《애마부인》이 서울극장에서 처음 개봉했을 때 밀려오는 인파로 인해 극장 매표소의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영화인들이 에로티시즘의 트렌드를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그 선봉에 서 있던 감독은 임권택으로, 70년대 내리 반공, 반일을 위시로 한 저예산, 저급 양산 영화만 찍던 그는 7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을 소재로 한 족보를 시작으로 보다 한국적인 소재와 한국의 역사를 영화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임권택의 포텐셜이 폭발한다. 그의 1981년작인 《만다라》는 대대적 호평을 받았고, 1987년작 《씨받이》는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감독상을 거두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후에도 1989년작 《아다다》와 《아제아제바라아제》 등이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젊은 감성에 맞는 청춘 하이틴 작품이 많이 개봉한 것도 이 시기이다. 198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한 최인호 소설가의 원작을 모티브로 한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이두용 감독의 《돌아이》 등 당시 시대상의 파격을 달리는 신선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1987년 이후에는 민주화에 힘입어 이념적으로 보다 자유로워지면서 이전까지는 금기시되었던 사회문제들을 다룬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다루던 영화는 주로 한국전쟁기 좌우익 대립, 군부 독재 시절 학생 운동, 80년대 급속한 도시 개발로 인한 빈부격차를 소재로 한다. 이 시기 활동하던 대표적인 영화감독은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등이 있다[8].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인 《칠수와 만수》는 고도 성장 속에 소외된 가난한 계층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주인공 중 한 명인 만수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장선우는 1988년 개봉한 《성공시대》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했다. 비록 지금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인해 충무로에 재앙을 불러온 한물 간 감독으로 취급받지만, 당시의 장선우 감독의 영화들은 흥행과 비평에서도 꽤 괜찮은 평가를 얻었다.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작품들도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1987년 “장산곶매”라는 독립 영화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후 이들은 1989년작 《오 꿈의 나라》라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직접적으로 다룬 독립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9]. 또한, 서울 올림픽의 그늘 속에 강제 철거 된 상계동 사람들을 다룬 “상계동 올림픽”이란 다큐멘터리도 올림픽이 일어난 같은 해인 1988년에 제작되었는데 바로 《송환》의 감독으로 유명한 김동원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금기시 되어왔던 사회 문제, 정부 정책의 비판과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성찰이 80년대 말부터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비록 이 때만 하더라도 소규모 자본의 독립 영화 수준에 그쳤으나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영구와 땡칠이》, 《우뢰매》 같은 어린이 영화마저 선풍적인 히트를 쳤다. 그야말로 ‘새로운 물결’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시기였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영화들이 수두룩한 이 시기는, 비록 60년대만큼의 찬란한 리즈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영화가 쓰러지지 않게끔 버팀목이 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점유율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노태우 정부 시절이 최악이라 할수있는데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한국영화시장이 매력적인 시장으로 받돋움하였고 때 마침 한국이 미국에 매년 수십억 달러 가량의 무역수지 흑자를 내었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쌍둥이 적자를 해결할 요령으로 동아시아 국가에 여러모로 압력을 가했다. 그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1987년에 할리우드 영화사 직배 허용을 하였고, 수입 쿼터제도도 대폭 완화하여 영화시장이 개방되다보니[10] 한국영화 점유율이 곤두박질 쳤었다. 1970년대 이래로 지속되온 영화산업 통제와 검열의 심화로 기본적인 경쟁력이 약회된 상황에서 시장보호조치로 점유율을 꾸억꾸억 유지하고 있던 상태였고 별다른 준비없이 바로 시장이 개방이 되다보니 홍콩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영화 시장을 휩쓸고 다녔고 반대 급부로 한국영화의 점유율은 급속히 떨어져서 1990년대 초반 들어서는 영화시장 점유율이 10%대로 떨어지기까지 했을 지경이었으며 이런 상황은 1994년부터 점유율이 다시 상승할때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따지고보면 흥행한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할리우드 영화와 홍콩 영화에 크게 밀려서 한동안 설 바람을 찾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3.6. 1990년대 :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등장과 세대교체기

1990년대에도 외국영화에 밀려서 한국영화가 침체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1993년 미국의 《쥬라기 공원》의 대히트로 인해 국가적으로 영화 산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히트작 역시 속출하면서 영화계로 많은 자금과 우수한 인재들이 유입되었으며 1994년을 기점으로 점유율도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11] 1990년 6월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시작으로 하여 흥행작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1993년작 《서편제》는 단관개봉으로 무려 100만 명이 넘는 당시 초유의 기록을 수립했다. 지금도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의 계보에서 《아리랑》, 《쉬리》 등과 더불어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영화로 손꼽힌다. 특히 강제규 감독의 《》쉬리》는 한국 영화계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은 메가히트 작품으로 유명하며, “한국 영화계의 역사는 쉬리 개봉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특히 쉬리의 경우는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해서 쉬리의 흥행을 기점으로 해서 1985년 이래 30%를 넘지 못하고 줄곳 미달하던 한국영화 점유율이 30%대를 넘기게 되었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에 큰 역할을 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1990년대의 최대 특징은 바로 기획자의 등장과 대자본의 참여로 영화계 전체가 완전히 재편됐다는 것이다. 영화의 제작과 배급에 있어서 과거의 주먹구구식 관행에서 탈피해서 하나의 산업으로 질적인 도약이 이루어졌고 그 핵심은 바로 기획자 즉 프로듀서의 등장이었다. 기획자가 등장하며 관객의 성향과 수요를 분석하여 영화 제작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부터 비롯된 결실의 대표작이 바로 《쉬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60년대는 감독의 시대, 70년대는 제작자의 시대, 90년대는 기획자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60년대를 주도했던 감독, 배우들과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룸으로써 80년대의 파격적 분위기를 계승해 더한층 발전을 이룩했다. 이 시기에는 해외에서도 양질의 작품이 다수 유입되어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기존의 극장 체제가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의 멀티플렉스로 개편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대기업이 영화 시장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비록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는 실험적인 시도와 성장을 멈추지 않았고, 《쉬리》가 《타이타닉》을 꺾는 대흥행을 연출함으로써 한국 영화계에 남아있던 패배주의를 깨끗이 일소했다.

특히 극장 체제 개편이 가지는 궁극적인 의의는 자본의 순환이 가능하게 된 점이다. 문민정부 이전의 한국영화는 지방 극장주가 영화의 상영권을 사는 형식으로 자본을 먼저 대고 티켓 수입은 자신들이 챙겼다. 제작자들은 선금을 받아서 돈을 벌 수는 있었으나 추가 수익은 없으니 차기작을 만드려면 다시 극장주에게 투자를 받고…수익은 또 극장주가 가지고…이랬던 것이 영화 시장 개방으로 해외 직배사가 한국 시장에서 영업을 할 수 있게 되고 현재와 같이 투자사로부터 자본을 받아 제작자가 수익을 내고 그 수익을 다시 투자사로 돌리는 선순환이 가능해졌다. 배급 체제 개편은 작품의 질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이전의 제작자들은 극장주에게 선금을 받아 포켓 머니로 챙기고 질 낮은 상영물을 만들어서 대충 극장에 걸었으나 영화시장 개방 이후로는 그런 대충대충 식 제작으로는 수익도 낼 수 없고 차기작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한국영화 상향 평준화에 일조하게 되었다. 옛날 제작자들이 좋았지~라며 배부른 소리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사실 이게 옳은 흐름이다.

이런 급격한 세대교체와 영화계 재편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직도 1960년대의 정서에 기대고 있던 자칭 영화계 주류들이 애니깽 사태라는 깽판을 치기도 했으나, 이들이 만들던 진부한 영화들은 대중의 혹평과 자본의 무관심속에 연달아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세대교체의 흐름만 가속화시켜 주었다.

이렇듯 기획자의 등장과 대자본의 참여속에서 영화인들은 그동안은 엄두도 못내던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영화에 컴퓨터 그래픽을 본격 도입한 《구미호》처럼 꽤 실험적인 시도도 많았고, 한국에서 절대 만들어질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판타지, SF 장르도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장르가 흥행과 비평에서 대박을 터진 작품은 1996년에 개봉한 《은행나무 침대》로, 탄탄한 각본과 제대로 된 기술력만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우리의 기술로 제작되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시망하긴 했지만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퇴마록》도 나왔다. 또한 강제규, 강우석, 박찬욱, 봉준호 등 21세기 들어 흥행감독이라 불리는 이들, 송강호, 한석규처럼 지금도 건재한 톱스타들이 데뷔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남부군》과 《태백산맥》처럼 탈이데올로기적인 작품들도 등장했고, 《여고괴담》처럼 새로운 감각의 공포영화도 출현하여 질적으로도 상향되었다.

3.7. 2000년대 : S급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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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성, 예술성, 흥행성 모두 상당한 성과를 이룬 르네상스기.

《쉬리》에 이어 또 한번 히트를 거둔 《공동경비구역 JSA》가 포문을 연 21세기부터는 영화관이 멀티플렉스 체제로 개편되어 대단위 관객 수용이 가능해지고 영화가 본격적인 대중문화로 정착했다. 1990년대 초반에 10% 중순까지 추락하던 한국 영화 점유율이 《쉬리》의 흥행을 시작으로 하여 그 이전에 좀처럼 넘을수없을것 같았던 40%선을 넘었고 2000년대에는 50%대를 오르내리면 점유율이 상승했다. 스크린쿼터제의 영향도 어느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는 주요 영화 제작국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비율.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해 자국 영화 점유율이 40%를 웃도는 나라는 인도, 한국, 프랑스, 가끔 일본, 중국 정도이다. 일본 영화가 도전자로서 본격적으로 개봉에 들어갔지만, 우려와는 달리 이쪽은 일본 만화에 비해 쪽도 못 쓰고 연전연패를 거듭했다.[12]

그러다 2004년, 《실미도》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이 넘는 대박을 거둠으로써 영화계에 폭발적인 흥분을 일으켰다. 그것도 모자라 같은 해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 기록을 경신하여 영화계는 시장의 파이가 무섭도록 커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후로도 격년 단위로 꾸준히 《괴물》, 《왕의 남자》, 《해운대》 등의 천만 관객 작품이 출현했고, 그것들을 제외하더라도 해마다 한두 작품씩은 꼭 영화사에 기록될 성공을 거두는 영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살인의 추억》, 《과속스캔들》, 《국가대표》, 《추격자》처럼 슬리퍼 히트[13]를 하는 영화가 부쩍 늘어난 것도 특징.

이처럼 영화계가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다 보니 《긴급조치 19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클레멘타인》, 《다세포 소녀》 등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고도 흥행에 참패한 괴작들도 속출했다. 또한 현 시점에선 흑역사로 치부되는 《디 워》 역시 800만 넘는 관객이 들었음에도 제작비 회수에는 실패했다. 사실 천만 관객이 성립하기 전에도 《예스터데이》 같은 대자본 실패작들은 꽤 있었다.

50~60년대 일본영화나 80~90년대 홍콩[14], 영화같이 전세계적으로 한국영화가 주목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2000년대 초중반은 산업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적 성취도와 장르적 실험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는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그에 따라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하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창동, 김기덕, 홍상수 등이 작가주의 영화로 소위 예술영화제를 휩쓸기 시작했고, 박찬욱, 봉준호, 임상수, 김지운, 류승완 등이 완성도와 실험정신을 겸비한 장르영화를 만들었다. 특히 2003년은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초리즈시절.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홍련》, 《실미도》, 《지구를 지켜라》 등 장르영화 명작 반열에 오른 작품들이 이 시기에 개봉했다.

한편으로 《여고괴담》이 지핀 불꽃을 이어받아 슬래셔 영화 붐이 일기도 했다. 이는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캠퍼스 레전드》 등의 미국산 슬래셔 흥행에 힘입은 것으로, 물론 대부분 클리셰를 답습하려 들다 실패를 맛봤지만 한국 호러영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넘버 3》의 성공 이후에 《조폭 마누라》, 《두사부일체》 등의 조폭 코미디가 양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사그라들었고 2010년에 들어와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독립영화의 약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잔잔한 양작들은 그간 마니아들의 전유물로만 인식됐으나, 2009년 《워낭소리》와 《똥파리》의 대대적 히트로 2000년대 말 독립영화 붐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했다.

3.8. 2010년대 : 위기 속 새로운 비전을 찾아서

3.8.1. 2010년대 초

2010년대 초반은 큰 기점이 존재하진 않았다. 물론 《마당을 나온 암탉》이 200만 관객을 돌파하여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획을 그었고, 《도가니》가 영화라는 매체의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등 크고 작은 이슈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한 《아바타》 이후 한국 영화계도 본격적으로 3D 열풍에 편승하기 시작했으나 제대로 된 3D영화는 만들지 못했다.

2012년, 《도둑들》이 천만관객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또한 천만관객을 돌파하면서 2012년은 천만영화 두 편을 배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에 대해서 김기덕 감독과 같은 사람들은 대형 영화관을 소유한 배급사의 스크린 독점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영화가 한국인의 생활 속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되었다는 점은 한국 영화의 미래에 대단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3.8.2. 2013년

2013년에는 《변호인》이 1000만 관객을 넘었고, 한 편 문병곤 감독의 《세이프》가 칸 영화제 단편부문 황금종려상(단편)을 받으며 한국의 독립/단편영화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독립 영화 제작자 및 감독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며, 문병곤 감독은 인터뷰에서 독립영화의 제작 여건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한국 영화는 분명 양적 성장을 이루고 있는 것은 확실하나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환경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도 2011년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 이후 노동조합 결성, 표준근로계약서 보급, 페어 필름 등을 통해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출연료를 제외한 인건비가 너무 낮다는 점이 크다. 짝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식 영화들이 범람하느라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상승했는데도 불구하고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 문제는 외면받는 상황이다.

그 외에도 지나친 매너리즘과 상업화에 대해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전체적인 시장의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쓰레기 영화(…) 역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메이저 배급사에서 제작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 중에서도 수준이 상당히 낮은 것들이 많고[15]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처럼 예술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낚는 감독도 좀처럼 탄생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거론되는 감독은 윤종빈, 그리고 나홍진, 장훈 정도. 최근에는 《더 테러 라이브》의 감독 김병우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소수 대기업 주도의 극장 독과점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영화 제작사가 배급 및 극장 상영까지 점유하면서, 자사 제작 영화를 몰아주기 식으로 배급하고 있다. 극장들의 절대 다수가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체인형 멀티플렉스로 바뀌어서 이 독과점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3.8.3. 2014년

2014년 상반기, 한국 영화의 약세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상태다. 6월까지 400만 명 이상 관객을 모은 영화는 《겨울왕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웠던 《수상한 그녀》가 유일. ‘한국형 느와르’라 지칭하며 장동건, 차승원 등 스타들을 앞세운 《우는 남자》, 《하이힐》이 《엣지 오브 투모로우》,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 흥행 대참패[16]를 당하며 작품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스타 마케팅이나 자극적인 장면만으로 더 이상 관객들을 끌어모으기 힘들다는 교훈을 한국 영화계에 던져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외화 강세 속에서도 이선균, 조진웅 주연의 한국 영화 《끝까지 간다》가 분전하였으며 2014년 하반기에는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 《해적: 바다로 간 산적》과 같은 대형 사극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다.

3.8.4. 2015년

2015년 상반기 시점에서 한국 영화는 흥행 부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2015년 상반기, 흥행실패 한국영화 리스트 초토화

2015년에 개봉해 200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가 겨우 4편에 불과한데 이 중 《강남1970》은 손익분기점도 못 넘긴 흥행 실패작이다. 흥행 실패의 이유로는 이전에 흥행했던 느와르, 스릴러, 사극 장르에 아무런 깊은 이해나 시도 없이 너도나도 뛰어들었지만 이미 식상해진 이러한 장르, 그리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그저 그런 스토리라인에 관객들이 외면한 것으로 꼽힌다. 더구나 이미 작년에 더 이상 스타 마케팅과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요소가 흥행에 득이 되지 않음이 여실히 드러났음에도 이러한 것을 망각한 점 역시 흥행 실패에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2015년 6월 중순 시점 국내 박스오피스를 보자면 1위부터 4위까지를 모두 외화가 장악하고 있는 판국이다. 천만관객 시대의 양적 성장에 비해, 현재의 한국영화는 소재의 참신함이나 장르적 다양성이 늘어나긴 커녕, 영화의 내용면에서 질적 하락이 두드러졌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2015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난히 부각되는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잘 분석한 기사도 있다. 한국 영화는 왜 ‘핵노잼’ 미운 털이 박혔나? 한국 영화 속의 캐릭터의 구축이 한국 관객의 니즈와 동떨어져 있다는 분석도 있으며 기승전결 구도를 이끌어나갈 연출의 식상함이나 연출력의 부재, 빠르게 변하는 현 세대에 뒤떨어지는 철 지난 코드를 내세우는 것 등등 앞으로 한국 영화계가 고쳐나가할 부분을 잘 정리하고 있다.

그나마 6월 이후에는 《연평해전》, 《극비수사》, 《암살》, 《베테랑》, 《뷰티 인사이드》, 《사도》, 《탐정 더 비기닝》, 《검은 사제들》, 《내부자들》 등이 2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을 거두면서 전반기의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최동훈 감독의 《암살》은 한국영화로는 금년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개가를 올렸고 《베테랑》 역시 천만관객을 넘었다. 《국제시장》도 천만 관객을 넘음으로서 2015년이 한국 영화 부진의 해가 될것이라는 우려는 불식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선전만으로 위에서 지적받은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 매너리즘 등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때문에 앞으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영화계의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17]

그래도 2015년에는 《무뢰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소셜포비아》, 《돌연변이》, 《소수의견》 등의 작은 영화들의 약진이 두드러졌으며 《검은 사제들》과 같은 한국판 장르 영화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다양한 영화가 나올 발판이 있는 셈이니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장르던간에 비슷한 영화가 계속 나오게 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마련이다. 한국 영화계는 그저 상업화에만 그치지 않고,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방향으로 질적인 향상을 위해 여러가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3.8.5. 2016년: 마이너스 성장 시대

한국 영화시장, 금융위기 후 첫 마이너스 성장

2016년 상반기에는 《검사외전》이 970만, 《귀향》이 350만, 《동주》가 100만을 넘기고, 《날, 보러와요》, 《곡성》의 성공으로 유달리 한국 영화가 부진했던 2014년, 2015년 상반기 때와는 반대로 《쿵푸팬더 3》, 《데드풀》, 《주토피아》같은 할리우드 영화/애니메이션들의 공세속에서도 제법 선전하는 작품들이 많다. 특히 20세기 폭스가 투자하고 배급한 《곡성》은 비평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얻으며 헐리우드 배급사의 투자 가능성을 더욱 열어주었다.# 또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도 한국 영화계 메인 스트림에서는 상당히 드문 소재인 동성애가 주 코드임에도 불구하고 42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2016년 상반기에 성공한 한국 영화의 수는 여기까지. 《잡아야 산다》, 《나를 잊지 말아요》, 《오빠생각》, 《그날의 분위기》, 《로봇, 소리》, 《나쁜놈은 죽는다》, 《좋아해줘》, 《순정》, 《남과 여》, 《무수단》, 《섬. 사라진 사람들》, 《대배우》, 《커터》, 《해어화》, 《시간이탈자》,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엽기적인 그녀 2》 등등의 2016년 상반기에 개봉한 수많은 한국 영화들이 대실패를 거둬 제대로 체면이 구겨졌다. 참고로 문서가 있는 영화들이 이정도지, 문서가 없는 영화들까지 합하면 이보다 더 많다. 2016년 한국 영화 흥행 상황. 실패한 영화들만 모아놓으면 작년 재작년의 한국 영화들의 상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도 하반기로 넘어오면서 2014, 2015년 하반기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국 영화의 전성기가 켜졌다. 《부산행》이 최고 오프닝 성적을 기록한 것이 그 예 중 하나. 부산행은 대만, 베트남, 필리핀 같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권에서도 대성공을 거뒀다. 《부산행》 외에도 《인천상륙작전》과 《덕혜옹주》, 《터널》, 《럭키》 등도 연이어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그와중에 여름 극장가 한국영화 빅4 중의 하나로 여겨지던 《국가대표 2》는 실패를 거두었다. 추석에 똑같은 한국 영화인 《밀정》은 성공을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참패를 거둬 서로 희비가 완전히 엇갈렸다.

또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눈에 띄는 트렌드라면, 항일을 내세우거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흥행하고 있다는 점.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을 다룬 《명량》이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것을 시작으로 《암살》, 《동주》, 《귀향》, 《아가씨》, 《덕혜옹주》, 《밀정》 등. 《대호》 혼자 본전 못 치고 망했다 류승완 감독의 차기작 《군함도》 역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03년의 황금기이후 할리우드 영화를 적당히 베껴서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비슷한 한국 영화가 나오는 상황이라 하향평준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있다.##

상업성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너무 공식에 의존해서 검증된 방식대로만 영화를 만들어낸다면 문제다. 그런 영화만 만들어내면 사람들이 싫증을 내고 상업성이 떨어지게 된다. 그럼 또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역사가 항상 작용과 반작용을 겪으면서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상업영화에 물렸다면 인디 영화들을 찾아보며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대형 투자배급사 영화가 늘 비슷비슷하다고 언론이나 관객들이 계속 지적하고 불평해야 정신 차리게 된다 -박찬욱#

한국 4대 배급사(CJ E&M,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NEW)체제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4대 배급사 점유율이 50% 아래로 떨어지고, 디즈니가 3위로 올라서는 등 2016년의 한국 영화시장은 조금씩 내부적으로 붕괴한다는 분위기다. 기사

2017년 1월 20일 잠정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영화시장 자체가 2009년 금융위기 직후 이후 관객수 기준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기사 이미 영화시장 자체가 포화상태이며, 스크린 독점으로 흥행몰이에 실패한 영화들은 개봉 첫날 망해버리는 등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

3.8.6. 2017년: 침체에서 회복되고는 있지만..

새해 첫 주 박스오피스 1위가 일본 애니메이션인 《너의 이름은.》이라는 진기록이 튀어나오고, 《더 킹》과 《공조》가 흥행에 어느정도 성공하기는 했지만 작품성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이 나오고 있다. 《너의 이름은.》과 《모아나》, 《라라랜드》 등이 롱런하면서 계속해서 10위 이내에서 움직이고 《더 킹》과 《공조》는 스크린독점까지 했음에도 780만 수준에 그쳤다. 《사랑하기 때문에》, 《여교사》등은 《너의 이름은.》에 밀려 개봉 첫날 망한 영화가 되는 등 충격이 크다.

2016년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한 한국 영화시장이 2017년 들어서 경기 침체 심화로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면서, 양극화가 극단적으로 치달을 것으로 보인다. 개봉 첫날 망한 영화가 되어버리는 작품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양극화의 직접적 예시.

총 관람객 자체는 2016년의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2017년 1~2월 관람객이 2016년 1~2월 관람객 대비 상승했고 2015년 1~2월 관람객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대박 영화는 《더 킹》, 《공조》 외에 나오지 못하고 200만~300만대 박스권에 갇혀버리는 중박에 그치거나, 아예 개봉 첫날 망해버리는 케이스가 쏟아지고 있다. 200만 명은커녕 100만 명도 넘지 못한 한국 영화로 3월 24일 현재 《사랑하기 때문에》, 《여교사》, 《싱글라이더》, 《그래, 가족》, 《레이디버그》, 《루시드 드림》, 《눈길》, 《눈발》, 《커피 메이트》 등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2017년 1분기를 종합했을 때, 1~2월에는59%의 점유율을 보였으나 《콩: 스컬 아일랜드》와 《미녀와 야수》의 공세 속에 크게 고전하고 있다.

4월에도 위와 같이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이 흥행을 하면서 역시나 고전하고 있다. 3월의 《미녀와 야수》, 《콩》, 《로건》 등으로 인해 외국영화가 한국영화 점유율을 추월한 이후, 5월이 되자 외국영화 52.3% vs 한국영화 47.7%로 관객 점유율이 크게 벌어지고 있다. 영진위 공식 링크 한국 영화로 박스오피스 1위를 한 건 《재심》 이후 무려 10주, 2달 반 만에 《특별시민》이 올라온 것이 전부일 정도.

1월 : 한국영화 54.5% – 외국영화 45.5% (더 킹, 공조)
2월 : 한국영화 58.6% – 외국영화 41.4% (더 킹, 공조, 조작된 도시, 재심)
3월 : 한국영화 31.5% – 외국영화 68.5% (로건, 콩: 스컬 아일랜드, 미녀와 야수)
4월 : 한국영화 38.2% – 외국영화 61.8% (미녀와 야수,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
5월 : 한국영화 34.6% – 외국영화 65.4%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에이리언: 커버넌트, 겟 아웃,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6월 : 한국영화 32.5% – 외국영화 67.5% (원더우먼, 미이라,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

5월 19일 현재 한국 영화 총 관람객은 마이너스로 예측되던 것을 뒤엎고 플러스로 돌아서서 2015년 수치를 0.1% 앞서 사상 최대치를 살짝 경신한 상태이다. 하반기에 흥행 작품이 많이 나와야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외국영화의 초강세가 지속되면서 상대적으로 한국 영화는 위축되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 2017년 한국 영화 중 《리얼》이라는 희대의 쓰레기 영화가 나온건 덤.

다만 《옥자》가 한국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는 개봉되지 못했지만 그 외 영화관과 해외 평단에서 좋은 성과를 냈고, 7월 이후로 《군함도》, 《택시운전사》, 《신과 함께》, 《남한산성》등의 기대작들이 개봉 대기 중이니 아직 더 지켜봐야 할 듯.

2017년 5월 31일까지 한국영화 누적 관람객 수는 82,183,734명으로 5월기준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웠다.(2위 2013년 5월 누적 80,946,656명) 이 중 외국영화 관람객은 45,476,937명으로 점유율 55.3%, 한국영화 관람객은 36,706,797명으로 44.7%이다.

4. 한국 영화에 대한 오해

4.1. 한국 영화는 해외 영화보다 상영관이 부족한가?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해외 영화, 대체로 할리우드산 블록버스터가 한국 극장을 독점하는 일보다 한국 영화가 독점하는 현상이 더 많이 있었고, 더 오래되었다. 당장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도 당시에는 스크린 독점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기사.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괴물의 성공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위기론이 사라지고, 작은 영화들이 피해를 보고, 스크린 쿼터제 축소 논란이 생기는 등 10년 전 일이었음에도 2010년대의 극장 상황이랑 별 다를 게 없다. 또 다른 영화인 2008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스크린수를 대부분 걷어가 그 《다크 나이트》가 미국에선 7월에 개봉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에선 8월로 보류해 개봉되었다. 2009년 영화 《해운대》도 당시엔 배급사의 힘을 입어 막강한 스크린 독점 현상이 일어났었다.

2010년대에도 한국 영화가 해외 영화보다 스크린을 더 많이 가져간 현상이 많았다. 2012년의 《도둑들》과 《광해, 왕이 된 남자》, 《늑대소년》도 마찬가지고, 2013년의 《7번방의 선물》, 《베를린》,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도 마찬가지다. 2014년의 《명량》은 말할 필요도 없고, 《수상한 그녀》, 《역린》, 《군도: 민란의 시대》 등 《명량》이 개봉하기 전에도 한국 영화가 해외 영화보다 스크린을 더 많이 잡았던 시절도 같은 해에 존재했었다. 그 이후에도 《해적: 바다로 간 산적》, 《타짜: 신의 손》, 《국제시장》, 《연평해전》, 《암살》, 《베테랑》, 《사도》, 《검은 사제들》, 《내부자들》, 《히말라야》, 《검사외전》, 《곡성》, 《아가씨》, 《부산행》,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터널》, 《밀정》, 《아수라》 등등등 한국 영화가 극장 스크린을 많이 배정받았던 시절이 많아짐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한국 극장을 독점하여 한국 영화를 죽인다는 논리는 이제 소용없게 되었다. 물론 2016년에도 할리우드 영화가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위와같은 점들을 결여하고 말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물론 스크린수 숫자로만 따지면 할리우드 영화 중 역대 최고 스크린수를 기록하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1,991개의 스크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1,843개의 스크린수가 한국 영화 중 최고 스크린수를 기록한 《검사외전》의 1,812개의 스크린, 《부산행》의 1,788개의 스크린에 비하면 많긴하다. 다만 상영점유율이 50%를 넘긴 상황에서 저런 영화보다 스크린이 적다고해도 스크린을 독점한 것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 그러한 변명은 궁극적으로 오십보백보, 피장파장의 오류에 불과하다.

정작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한국 극장을 독식하던 때는 한국형 텐트폴 무비가 없는 비수기에 자주 일어난다. 《아이언맨 3》 나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처럼 어린이날 연휴에 개봉하거나 트랜스포머 시네마틱 유니버스 시리즈의 영화들이나 《쥬라기 월드》처럼 6월 비수기, 《인터스텔라》, 《마션》처럼 10, 11월에 한국 극장을 점령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이 시기에는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영화를 죽인다는 소리가 비교적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이들의 논리는 명백하게 틀렸는데, 정작 이 시기에 볼 만한 한국형 텐트폴 무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벤져스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마블 코믹스 원작 영화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가 개봉했을 때 《역린》이 어린이날 연휴에 선전했다는 사실을 감안하자. 《역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만약 2013년 어린이날에 《설국열차》가 개봉하고, 2015년 어린이날에 《베테랑》이 개봉하고, 2016년 어린이날에 《부산행》이 개봉했다면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졌을 것이다.

또 정작 한국 영화의 성수기에는 해외 영화가 대체로 한국에선 힘을 못쓴다. 2014년 여름에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해외에선 모두 성공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군도》, 《명량》, 《해적》의 성공으로 인해 참패를 거두었고, 연말에 개봉한 《호빗: 다섯 군대 전투》는 《국제시장》의 선전으로 부진을 겪었고, 2015년 연말에 개봉한《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히말라야》의 선전으로 인해 부진했고, 2016년 여름 성수기엔 《제이슨 본》과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그저 그런 성적을 거두었다. 물론 《아바타》나 《겨울왕국》, 그리고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과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은 한국 영화들의 성수기에 개봉했음에도 성공한 이례적인 케이스도 존재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례적이고, 흔하지 않은 현상이다. 그리고 《아바타》가 존재했음에도 비슷한 시기의 한국 영화 《전우치》가 선전했고, 《겨울왕국》과 비슷한 시기의 한국 영화 《수상한 그녀》가 선전함으로 설사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극장을 독식한다 해도 잘 만든 한국 영화는 성공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스크린수가 적다고 실패한다는 논리는 《마당을 나온 암탉》, 《주토피아》의 사례를 통해 더는 소용없는 논리가 되었다. 물론 이 둘은 대단히 이례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특정한 영화나 영화들이 스크린을 독점하는 현상 그 자체가 근원부터 영화 시장에 독이 되는 잘못된 현상이다. 당장 미국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제재하는 법률(배급 – 상영 분리)이 철저하게 생겨나 독과점을 뿌리 뽑은 것과는 대조적[18]으로 한국에선 이러한 법률이 없어 현재까지도 골썩이고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5. 한국 영화의 폭력성에 관하여

한국 영화의 특징 중 하나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영화가 질과 양의 측면에서 급속히 성장하면서, 한국 영화를 대하는 종래의 시각에서 진일보된 비평을 내놓는 외국 평론가들이나 인문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지적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폭력과 욕설.[19] X발로 시작해서 X발로 끝난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인 그레이디 핸드릭스의 기고문이나, 프랑스의 작가이자 인문학자인 르 클레지오의 기고문을 보면 서구인들이 한국 영화의 강렬한 폭력성에서 낯섦과 강한 인상을 동시에 받고 있음이 드러난다.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을 위시로 한 30~50대의 제대로 된 감독들을 보면 그들의 영화세계, 한국사회, 그리고 폭력성이 각각의 감독들의 개별 작품들 사이에서도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 의한 폭력, 국가의 강요 또는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간의 사적 폭력은 현대 한국 영화의 주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다. 서구권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폭력이 일회적이고 충동적이고 박제된 것이라면, 한국 영화에서의 폭력은 보다 더 구조적이며 습관화된 것으로 드러난다. 대개의 비평가들은 순탄치 못한 근현대를 보낸 한국 사회의 폭력성이 영화에 투영된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한다. 게다가 이런 폭력을 법에 의해서 처벌받거나 받을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심지어 아예 안 하는 영화가 굉장히 많다.[20]

물론 김기덕, 박찬욱 등이 국내에서도 작가주의 감독 등으로 불리며 꽤 독특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해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 위주로 한국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정작 한국 내에서 대흥행한 작품을 보면 《실미도》, 《살인의 추억》, 《친구》 정도를 제외하고 강렬한 폭력성을 수반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6. 해외 명작 영화의 제목을 카피하는 문화

마케팅 업계의 기괴한 전통으로, 이미 충분히 알려진 다른 영화의 제목을 그대로 따다가 붙이는 경우이다. 감독들이 오마주로서 붙이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보면 또 영화만 그런게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이런 짓을 할때가 적지 않으며, 제일 큰 문제는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을 때 제목의 원전이 되는 작품과 제목을 카피한 한국 작품이 도저히 구분이 안된다는 점이 있다.

영화제목 ‘베끼기’ 해도 너무해
영화제목 카피의 노골적 부작용
‘차이나타운’ 소심한 제목 변경, 이게 말이 되나

6.1. 해당 작품 목록

영화, 드라마 해당하는 작품들은 전부 서술.

  • 개 같은 날의 오후[21]
  • 나는 전설이다
  • 네 멋대로 해라
  • 달콤한 인생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복수는 나의 것
  • 비열한 거리
  • 에덴의 동쪽
  • 여인의 향기
  • 용서받지 못한 자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위대한 유산
  • 이브의 모든 것
  • 적과의 동침
  • 차이나타운(2015)
  • 품행제로
  • 하울링
  • 좋은 친구들
  • 순수의 시대
  • 아이언맨(KBS)
  • 뜨거운 것이 좋아

좀 더 많은 예시를 보려면 제목 베끼기 항목 참조.

7. 장르

스릴러, 드라마[22], 액션같이 최대한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장르들이 많다. 반대로 SF, 판타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고 코미디와 로맨스는 2000년대까지는 꽤 있었지만 현재는 많이 사그러든 상태. 2000년대에는 조폭 코미디가 우세했지만 얼마 안가서 사그라들었다.

SF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후 투자가 완전히 끊겨버렸기 때문에 뭐라 말할 것도 없고 SF와 판타지[23]는 둘 다 제작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리스크가 많이 따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러한 장르들이 성장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많은 SF 영화와 판타지 영화가 소설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에서 한국의 소설과 만화 시장은 그만큼 크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나마 평가가 좋은 한국 SF/판타지 소설이라는 것도 한국인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

해외에서는 재밌는 한국영화 하면 주로 스릴러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박혀 있는 편인데, 실제로 《올드보이》나 《추격자》, 《살인의 추억》 등 해외에서도 흥행했던 작품이 거의 스릴러 계통이기도 하다. 일본 등에서도 한국 스릴러는 특유의 ‘정제되지 않은 사실성’ 때문에 더 재밌다는 평도 많은 편.

《괴물》, 《용가리》, 《불가사리》, 《우주괴인 왕마귀》 같은 괴수물은 매우 적다.

한국 영화에는 신파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다. 특히 한국식 코미디는 웃기면서 시작하다가 끝에는 눈물을 짜내는게 일종의 공식화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러한 연출에 어느정도 비판 요소가 생기게 되면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

8. 그 밖에

드라마와 더불어 국내에서 수요가 높은 영상 매체 중 하나다. 다행히도 퀄리티 높은 영화일수록 한국 특유의
사랑타령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안 봐도 비디오스런 스토리는 나오지 않는다.

글자 자체를 두껍게, 강렬한 색상으로 디자인한다. 여기에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한 컷 들어가고, 또 주인공 남녀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감독과 영화배우의 이름이 꽤 큰 글자로 추가된다. 부족하다 싶으면 영화를 설명하는 자극적인 문구까지 더해진다. 마지막으로 영화사의 로고와 유명한 제작자나 스태프의 이름, 그리고 어떤 경우는 최악의 장식적인 패턴까지

포스터는 영화의 정보를 모르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보세요 라고 설득한다. 당연히 멋지고 이쁜 포스터를 가진 영화가 구닥다리 수준의 포스터에 비해 사람들을 더 끌어모을 수 있다. 분명히 한국 소비자들도 깔끔하고 멋진 포스터를 선호한다. 해외의 영화들은 영화의 내용이 대충 이런 식이다 라고 어필하듯 영화의 주된 내용을 유추 할 수 있도록 포스터를 만들지만 우리의 한국 영화는 내수용 포스터에 주인공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걸어놓고 각종 미사여구와 글귀 따위를 무자비하게 집어넣어 보는 이로 하여금 조잡함을 느끼게 만든다. 이는 정보의 과다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1900년대 중반기, 당시 영화 포스터는 두꺼운 글씨와 강렬한 색,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를 크게 넣고, 주인공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넣은 후, 영화 제작사의 로고와 제작자 이름. 심한 경우 보기 흉한 패턴이나 장식을 집어넣는 것이 트랜드였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수 많은 아티스트들이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미 50년도 지난 2010년대, 2020년대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1900년대 중후반의 스타일로 퇴화한다는 것은 아직도 과거에서 살고 있는 포스터 제작자들 때문으로 보여진다. 최근 들어 변화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지만 아직도 비정규직특수요원, 끝까지 간다와 같은 포스터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00년대 초에는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등이 크게 히트하였고 이 외에도 드라마 《야인시대》를 시작으로 조폭미화물이 범람했지만 태생적으로 매너리즘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지금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친구》, 《비열한 거리》처럼 조폭물임에도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품도 간혹 있었다. 미화물이 아니니까

해외 영화제에서도 수상을 거두면서 차츰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서양에서 90년대까지는 일본과 홍콩, 중국, 인도 그리고 이란을 제외한 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없다시피 했고[24], 90년대 초반 들어서서 중국 영화나 이란 영화에 대한 관심이 늘긴 했으나 상대적으로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 김기덕, 박찬욱 등의 감독이 조명되면서 비로소 한국 영화가 서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 부문에서는 아직 단 한번도 후보지명 이력이 없고 유럽 3대 영화제인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에서도 꽤 굵직한 수상 이력은 종종 있으나 2011년까지 최고상(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은 수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2012년 9월 9일(한국 기준), 마침내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3대 영화제 중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박찬욱과 이창동 감독조차도 이런 위업은 달성하지 못했다. 이걸로 마침내 한국 영화계의 오랜 숙업 중 하나를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0년대 부터는 SM, YG, JYP등의 연예계 기획사들의 권력이 매우 커졌으며 이들은 일본의 연예계 기획사들의 운영방식을 벤치마킹하여 자신들의 아이돌 그룹 멤버의 영화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했다.[25] 《건축학개론》의 수지와 2017년에 개봉된 영화 《공조》의 윤아가 대표적. 한국 연예계의 동향을 보면 이러한 케이스들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1996년 영화 필름 의무제출 제도가 생기기 전까지는 필름에 대한 보존이 굉장히 열악했다. 원본 필름을 해외로 수출해 버리거나(!) 헐값에 팔아서 필름이 밀짚모자 틀로 쓰이지 않나[26], 별걸로 재활용되거나 여의치 않으면 마구 태워서 처리했다. 광복 이전이나 이후 6.25 때까진 이해가 가도 50~60년대는 물론 80년대 영화조차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고전영화들이 넘친다. 한국에선 필름 자체가 사라졌다가 창고 구석에 박힌 게 발견된 적도 있고 감독의 유족, 소장가 또는 고물상이나 해외영화제로 출품된 필름들을 공수받아서 겨우 복원한 경우가 많다.(《오발탄》, 《빨간마후라》 등) 그러다가 2016년 5월, 한국영상자료원이 파주에 필름 현상/인화기 및 스캐너를 보유한 영화보존센터를 열어 본격적인 고전영화의 복원이 가능하게 됐다.#

DVD와 블루레이 시장의 경우 한국의 IT 인프라에서 파생된 불법 복제로 인하여 계속 침체일로에 있다. 사실 다른 나라들도 스트리밍 서비스나 합법 다운로드 서비스가 널리 퍼지고 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도 광매체 시장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특히 미국의 넷플릭스나 훌루와 같은 OTT 서비스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IPTV와 왓챠플레이 등의 유료 VOD, 스트리밍을 통한 새로운 2차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한국 영화계가 해외 영화계와 차별화되는 또다른 지점은 영화의 흥행을 집계/표현하는 방식이다. 미국을 비롯해 많은 해외의 영화 시장에서는 매출액으로 영화의 흥행을 표현하는데 비해(ex: 십억 달러 돌파 영화), 한국 영화 시장에서는 동원 관객수로 영화의 흥행을 표현한다.(ex: 천만 관객 돌파 영화).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2차 시장이 약해 영화관에서의 수입이 사실상 영화가 올릴 수 있는 수입의 전부이고, 관객수로 영화의 흥행을 집계하면 시사회나 무료입장권으로 영화를 본 관객들도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 이 때문에 영화의 제작비가 공개되도 손익분기점을 어림잡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2017년 현재는 대략 (총 제작비) * 0.0003 = (손익분기점 관객수)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마케팅 비용을 포함해 총 제작비가 260억 원으로 추정되는 《군함도》의 손익분기점은 약 800만 관객.#

9. 관련 문서

  • 한국 영화/목록
  • 한류/영화산업 통계
  • 한국 작품의 외국 리메이크
  • 외국 작품의 한국 리메이크
  • 만주 웨스턴
  • 쌈마이
  • 제목 베끼기
  • 천만 관객 돌파 영화
  • 단편영화
  • 독립영화
  • 대종상
  • 청룡영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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